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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노비스 기획서 (어린 의뢰인 원작)  /

2014년 12월 원작 탈고,  2019년 5월 영화 개봉

(각본 전체파일은 원작 자료실에 업로드 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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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지지 못한 아이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어른들이 울고 싶은 시대에 어른들을 울게 만들어 줄 이야기.

그리고 그 속에서 어른들이 몰랐던 아이의 또 하나의 진실.
“나는 죽고 사는 문제를 묻는데, 어른들은 사실이냐 아니냐를 따져요.”



사회적 배경 “방관자”
“칠곡 사건은 한국판 제노비스 사건”


1964년 3월 13일,
캐서린 제노비스는 퇴근 후 집으로 돌아가다가 강도의 습격을 받았다.
그녀는 강도의 칼에 찔려 비명을 질렀지만,
죽어가는 35분 동안 목격자 38명 중 아무도 그녀를 구출하지 않았고,
그녀는 그대로 숨졌다.
후에 법정에서 살해범은 이렇게 말했다.
“집집마다 불이 켜졌지만, 사람들이 사건 장소로 올 것 같지는 않아서 계속 했다.”


계속된 아동학대신고에도 불구하고, 결국 죽음에서 아이를 구해내지 못한

한국판 제노비스 사건과도 같은 칠곡 사건을 통해

우리 사회의 방관자적 자세와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비판하고,

그 속에 활약하는 주인공을 통해 한국 사회에서 시대적으로 필요한,

법의 사각지대에서 행동하는 인간상을 제시해본다.



작품적 가치
“사실이 무엇인가는 중요하지 않다는 진실의 가치.”


칠곡 사건이 괴이한 점은 11살 아이가 동생을 죽인 계모의 죄를 대신 지고,
“내가 내 동생을 죽였다.”라고 자백한 데에 있다.
그러나 사건을 추적한 결과, 진실은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단지, 아이는 살고 싶었을 뿐이다.
어른들은 그런 아이를 한 번도 아이의 마음으로 바라본 적이 없었다.
모두가 사실이냐 아니냐에만 관심이 있고, 아이를 살리거나 보호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단지, 이 괴이한 사건에 대한 논리적 해석만이 난무할 뿐이다.

사회가 이런 각성해야 할 진실이 있을 때, 의미 있는 이야기는 성립되는데,
그것이 이 이야기가 세상에 나와야 꼭 하는 이유다.



현실의 “딜레마”를 풀어내다.

한 아이가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둔갑하면서 살인 고백을 선택하는 정점의 딜레마.
“내가 내 동생을 죽였다.”


칠곡 사건의 핵심은 아이가 계모의 학대를 경찰에 신고했지만, 방관자들에 의해 사건은 묻혀지고,

후에 아이가 방관자들 앞에 살인 고백을 하며 돌아온다는 것이다.

그것을 목도한 방관자들의 죄의식을 깨우면서, 실제 사건은 사회적 파장과 심리적 경종을 울리게 된다. 

죄를 짓지 않았으나 사람들을 죄의식에 빠지게 만든 이 사건의 아이러니가

이 이야기의 가장 큰 감정적 포진이며,

그 원인을 사회구조적인 문제와 사람들의 방관자 자세가 같이 접목됐을 때,

그 조합이 어떻게 개인에게까지 내려와 영향을 미치는가로 보여주고 있다.
또 이 접목에 노출된 아이는 어떻게 왜곡된 현실 속에 놓이는가... 에 대해서

우리 사회는 심도 깊게 논의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왜곡 속에서 아이는 파격적인 “내가 내 동생을 죽였다.” 딜레마를 탄생시켰다.
이 작품은 그 복잡한 프로세스를 아이의 관점과 감정을 통해 쉽게 풀어준다.

오히려 어른들의 괴이한 세상을 학대받은 아이의 관점으로 전환해서 거꾸로 읽어들인다.


법이 만들어질 때까지 사각지대는 내버려 둬라. 할 일은 했다.
하지만 사각지대에서 무수한 아이들이 고통받거나 죽어간다.
내일이 아니니까. 남이 구하겠지. 귀찮잖아. 법이 알아서 하겠지. 법이 아닌 걸 어떻게.
아이가 죽어도 모두 다 계속 말하고 있다. 나는 죄가 없다고.


그러나 아이 입장은 달랐던 것이다.
죄가 없는 것으로는 자신이 살질 못한다.
그래서 아이는 자신을 보호해주는 않는 모든 이들로부터 떠나,
오직 자신이 살겠다고 생각하니까 법과 윤리, 그 모든 걸 뛰어넘게 된 것이다.
그 정점에 “내가 내 동생을 죽였다.”라는 고백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이 딜레마의 실체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동생을 죽인 괴물이 되어버린 아이.
그러나 아이의 눈에는....

동생을 죽인 살인자와 함께 살 수 밖에 없게 만든 이 세상이 바로 괴물인 것이다.  



스토리라인,
아이의 심리적 경로로 그려진 사회를 향한 8가지 정서적 테마 . 


1. 아이가 학대의 부당함을 느끼고 사회에 조력을 구함.
2. 계속된 조력의 무산을 통한 사회에 대한 공포.
3. 마지막 희망이자 조력자에게조차 버림을 받는 아이.
4. 세상에 대한 포기와 동생의 죽음의 충격.
5. 살기위해 계모에게 동의, “ 내가 내 동생을 죽였다.” 아이의 살인 고백.

6. 아이와 계모의 생존의 동의를 깨기 위해, 죄의식에서 각성한 조력자가 다시 돌아오다.
7. 격리, 진실을 말하기까지의 아이의 고통과 치유.
8.  “나는 무죄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세상의 양형 판결.



- 2014년 8월 작성자 민경은 -






*원작을  그린 작가적 시선.


-  작가의 역할 중 하나는 의미 있는 타인의 고통을 읽고,

그것을 대중에게 대신 감정적으로 전달해서 새로운 가치 창출을 하는 것.


죽은 동생을 이렇게 때리고 저렇게 때리고 했다고 술술 얘기하던 아이에게 경찰은 사진 하나를 내민다.

바로 자신이 학대받은 사진이었다.
그 사진을 보던 아이에게 경찰은 묻는다.
이 사진 기억 나니..?
누구예요?
너잖아...
(갸우뚱) 이거 난가.. 기억 안나... 그랬었나...?
이런 장면이 나왔다.
경찰이 기억 못하냐는 질문에..
아이는 그렇다고 대답했지만...
사실 아이는 아주 잠시지만 자신의 고통을 기억해냈다...
잔혹한 어른들은 언제나 고통을 그런 식으로 소환해낸다고 아이는 생각했다.
아이는 그 고문과 같은 학대속에서 사진속 그 장면이 나온 그때... 한 번 죽은 것이다.
아이가 살던 세상의 불은 그때 모두 꺼졌다.
아이는 그때 깨달았다.
그토록 몸부림쳤지만 아무도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고, 자신은 죽었다는 걸.
죽음의 고통 속에서 영혼은 죽고,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겨우 살아남았을 때...
다시 눈을 떴을 때, 아이는 다시 태어났다.
정신적으로 다시 태어난 아이는 살아남기 위한 무의식에 생존의 방정식을 다시 세웠다.

작가인 나는 사실보다는 진실에 관심이 있었다.
이 칠곡사건의 경우는 원인이 외부의 불신에 기인한다.
왜냐하면 이 아이는 이전에도 계모를 신고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후에 고문과 같은 학대를 견디면서 아이는 현실에 대한 일종의 이물감을 느끼게 된다.
자신의 행동을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는 인지부조화를 겪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말과 행동을 현실적으로 해석하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이 감정을 느끼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아이는 자아가 한번 괴멸된 이후에 겪은 일련의 사건의 일들을 잘 체감하지 못한다.

그것을 두고 어떤 느낌을 가져야 할지 감정과 판단력을 상실했다.
그러나 그런 생존에 대한 정신적 무장을 하고 돌아온 아이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더 혹독한 현실이었다.
모두가 이 아이에게 바라는 것은,

죽음으로부터 널 지켜줄 순 없지만, 그간 너에게 있었던 일을 알고 싶으니 모든 사연을 얘기해라... 였다.
물론 네가 솔직하게 얘기하면 우리가 널 도와주겠다고 모두가 끊임없이 유혹했지만,
아이는 이제 속지 않았다. 아이의 방어 기제는 다시 작동했다.
‘나는 모른다.’ ‘내가 때렸다.’ 고 대답했다.
그리고 아이는 경찰서로 찾아온 동생의 살인자인 새엄마의 손을 잡는다.
그 손을 잡고 역시나 그 집으로 다시 돌려 보내진다.
아이는 말 안 하길 참 잘 했다고 속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어른들은 언제나 알고 싶은 것만 캐내고 다시 살인자의 손에 자신을 맡기니까.
아이는 결국 세상을 이겼다. 그랬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아이가 살아남은 비밀은, 아무도 믿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현명했다.
말했다면 아마도 누명을 벗고는, 그대로 집에 돌아가 죽거나 다쳤을 것이다.


이것이 사건 당시에 아이의 관점에서 바라봤던 나의 작가적 시선이었다.

이후, 아이가 진실을 말한 시점은 완전히 계모로부터 격리된 시점이며,
그로부터 분명해진 이 사건의 쟁점은 바로,
아동학대 피해자의 사회를 향한 불신.
즉, “어른들을 믿으면 죽는다.”는 자기 생존의 결론이다.
그 참혹한 쟁점 속에서 탄생한 충격적인 딜레마.
“내가 내 동생을 죽였다.”라는 아이의 살인 고백에 대해서,
작가로서 이 부분은 앞으로도 반드시 잊혀지지 않고 회자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 2019년 5월 기고문 中 -